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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전당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 눈을 내려 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르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25일상한가
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峻險한 산맥이 있다.
― 1938. 6. 19.
지금은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너무도 쉽게 사랑의 대상을 바꾼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조선업종
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름도 생소한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사랑이란 말이 남용되고 쉽게 소비되는 오늘날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랑의 전당’은 윤동주가 처음 쓴 사랑 시다. 젊은 윤동주에게 불쑥 찾아온 낯선 감정과 그로 인한 당혹감이 “순아 너는 내 전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라는 질문으로 표현KOSDAQ
되었다.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이라는 구절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면면히 이어온 고유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암사슴 같은 순이는 눈을 감고 사자 같은 자신은 엉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서로를 의식하지만, 사랑을 ‘벙어리’라고 표현한 점에서 머뭇거리며 개미증권
수줍어하는 청춘의 풋풋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화자는 순이에게 성스러운 사랑의 촛대에 뜨거운 불이 꺼지기 전에 앞문으로 내달리라고 청한다. 자신은 어둠과 바람이 몰아치기 전에 뒷문으로 사라지겠다고 한다. 한 사람은 앞문으로 달려가고 또 한 사람은 뒷문으로 사라진다면 두 사람은 맺어질 수 없다. 왜 이토록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까? 왜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어눈높이주식
지려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은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암시한다. 그것은 앞에 나온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딪치기 전”의 상황과 관련된다.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앞길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운명적으로 직감한 것 같다. 그는 상대를 시련에 동참시키기보다는, 홀로 사랑을 지키며 상대를 아늑한 호수처럼 평온하고 안전한 상태에 두고자 했다. 이것이 윤동주가 지닌 사랑의 자세다.
윤동주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진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전당’에 잠시 머무르지만, 서로의 삶의 무게와 방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윤동주는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면서도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겠다고 했다. 이 구절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사랑이란 소유나 집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뜻한다. 스물한 살의 청년 윤동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아늑한 호수에 머무십시오. 저는 험한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사랑의 전당, 소년, 눈 오는 지도… 윤동주 詩에 나오는 ‘순이’는 누구일까
윤동주는 그의 시 ‘바람이 불어’(1941. 6. 2.)에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라는 구절을 남겼다. 그런데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발문을 쓴 친구 강처중은 “윤동주가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라고 공식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 사실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말하지 않고 애써 감추었다고 덧붙였다.
윤동주의 2년 후배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입학한 후 윤동주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가 따라간 교회는 연희전문과 이화여전의 연합 교회인 협성 교회였다. 이화여전 소강당에서 예배를 보았고 예배가 끝나면 영어 성서반에도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이 교회에 윤동주가 아는 이화여전 문과 여학생도 참석했는데, 윤동주가 존경하는 분의 딸이라고 했다. 밖에서 따로 만난 일은 없지만, 같은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같이 통학했고 교회에서 눈길만 주고받았다고 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윤동주는 입학한 해인 1938년부터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협성 교회에 다녔다고 하니, 이 시에 등장하는 ‘순이’가 그 여학생을 모델로 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윤동주의 광명중학교 후배이자 연희전문 후배인 장덕순은 자신이 중학교 때 윤동주가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을 때 이화여전 다니는 여학생과 거니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정병욱이 보았던 그 여학생이 윤동주 부친의 친구 딸이라고 했으니, 정병욱과 장덕순이 목격한 여성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순이’가 나오는 작품은 ‘사랑의 전당’ ‘소년’ ‘눈 오는 지도’ 세 편이다. 윤동주는 그가 사랑했으나 끝내 마음 깊이 감춘 한 여인을 떠올리며 이 작품들을 쓴 것일까?
[윤동주와 사람들]
조선어 지킨 스승 최현배… 동주는 그에게 민족정신을 배웠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첫 학기에 조선어 수업을 들었고 그 과목만 100점을 맞았다. 조선어 과목의 담당 교수는 최현배였다. 연희전문의 동기생들은 윤동주가 최현배 선생의 강의를 들을 때 항상 앞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고 증언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형이 방학을 맞아 고향에 올 때 책을 한 보따리씩 지고 왔는데 거기 최현배의 ‘우리말본’이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말본’은 13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전문서인데, 윤동주는 이 책도 정독할 만큼 최현배 선생의 학문에 관심을 보였다. 최현배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1938년 9월 교수직에서 해직되었으니, 윤동주는 최현배의 마지막 강의를 들은 셈이다.



외솔 최현배./독립기념관


최현배(1894~1970)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국어학자 주시경에게 조선어강습을 받으며 국어학 연구에 뜻을 두었다.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6년 3월 연희전문 교수로 임명된 후 자신의 민족관을 정리하여 ‘조선 민족 갱생의 도’라는 제목의 글을 ‘동아일보’에 4개월간 연재했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바탕 위에서 혼자 힘으로 국어학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결국 일제의 탄압을 받아 교수직에서 해직되었고 1941년 도서관 사서로 복직되었으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다. 독립운동 혐의로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외솔 최현배./윤동주기념관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최현배 선생이 이런 수난을 겪는 것을 목격했다. 윤동주 부친의 사촌 동생인 윤영춘(1912~1978)은 윤동주와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고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해서 윤동주와 친밀하게 지냈다. 윤동주가 방학 때 와서 자신을 만나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최현배 선생을 꼽으며 선생에게 배울 점을 이것저것 열거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윤동주의 마음을 윤동주 부친 윤영석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윤영춘이 해방 이듬해 용정에서 서울로 떠날 때, 영석 형이 자신의 손을 잡고, 아우가 서울 가서 동주의 시집을 내게 되면 최현배 선생의 서문을 앞에 실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윤영춘은 영석 형의 뜻을 이행하지 못한 것을 못내 송구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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