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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은민 작성일19-01-06 15:31 조회1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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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학살자들?

 

1942년 폴란드와 1980년 광주

 

 

 

 

 

 

 

목차

그들에겐 학살에 참여하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타인의 목숨보다 소중한 나의 체면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한 수동적 공범

그리고 1980년 광주

수동적 방관자의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

 

그들에겐 학살에 참여하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1942713, 나치의 치안경찰 소속 ‘101 예비경찰대대대원들은 새벽 2시에 기상했다. 이들은 대부분 함부르크에서 온 중년의 가장들로,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정규군으로 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는 대신 후방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점령지 폴란드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이 겨우 3주 전에야 배치된 이 늙은 신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리둥절해 하는 이들을 태우고 꼭두새벽에 주둔지를 떠난 군용 트럭은 울퉁불퉁 돌길을 헤치며 두 시간을 달린 끝에 30km쯤 떨어진 유제푸프(Józefów)에 이들을 내려놓았다. 바르샤바 남동쪽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 마을 유제푸프에는 당시 1,800명가량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대대장 빌헬름 트라프(Wilhelm Trapp) 소령은 마을 입구에서 하차하여 반원형으로 자신을 둘러싼 대원들에게 오늘의 임무에 대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현장에 있던 한 대원의 기억에 따르면, 53세의 직업 경찰 출신 트라프 소령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소연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이 난감한 임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명령은 명령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미국의 독일 상품 불매운동은 유대인들이 뒤에서 부추긴 것이며, 저항군 게릴라들과 연결된 유대인들이 이 마을에 있다고도 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 본국의 부녀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늘의 임무 수행이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장황한 서두 끝에 대대장이 전달한 오늘의 임무는 마을의 유대인들을 전부 집결시켜 그 가운데 노동력이 있는 남자들은 선별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노동력이 없는 여자와 어린이, 노인 등은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것이었다. 임무에 대해서 설명한 후, ‘파파 트라프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트라프 소령이 대원들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나이 많은 대원들 가운데 이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열외로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중장년 예비역으로 구성된 예비경찰대대의 특성을 고려한 제안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3중대원 오토 율리우스 심케(Otto Julius Schimke)를 필두로 10여 명이 앞으로 나왔다. 이들은 소총을 반납하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작전이 곧 시작됐다. 3중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1중대와 2중대가 유대인들을 끌어내 중앙광장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한 노인과 병자, 저항하거나 숨으려던 자들, 모든 어린아이는 광장까지 가는 수고를 덜고 자기 집에서 사살되었다. 광장에 집결한 유대인들 중 노동력이 있는 건장한 자들은 강제수용소로 호송하고, 나머지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보내 사살했다.

 

숲에서는 의학박사이자 아코디언을 멋지게 연주하던 낭만파군의관이 사살조 대원들을 모아놓고 임무를 설명했다. 군의관은 희생자들을 즉사시키려면 목 어느 부위에 총구를 겨누고 발사해야 하는지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꼼꼼히 설명했다. 두개골이 박살나서 뇌수와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군복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목 윗부분 경추에 정확하게 총구를 대고 발사해야 한다고 했다.

 

지휘관인 파파 트라프가 사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울면서 자신의 명령을 한탄하고 방황하는 동안 대원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주저하다가 첫 번째 열외 기회를 놓친 대원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학살이 시작되자 두려워졌다. 이들은 소속 중대장을 찾아가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서 더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주장해 면제되었다. 또 일부는 슬그머니 학살 현장에서 떨어져 어슬렁거리면서 임무를 회피했다.

 

500명의 대원 가운데 트라프 소령의 열외 제안에 곧바로 반응한 10여 명 외에도 이처럼 이런저런 방식으로 학살 임무를 회피했던 대원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살조에 편성된 대원 중 최소한 80%가 유대인 1,500명을 모두 학살할 때까지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많은 대원이 숙소로 돌아간 후 만취할 정도로 술만 마셨다는 기록은 그들이 가졌던 자괴감과 수치심, 공포를 말해준다.

 

타인의 목숨보다 소중한 나의 체면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 나치 독일군 가운데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끔찍한 처벌을 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제푸프에서 학살 임무를 거부한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는 본인이 원한다면 학살 행위에서 면제될 기회가 있었다.

 

또 일부는 자신이 경찰 본연의 업무 이외의 임무에 부적합하다는 청원을 제출해 본국으로 전출되기도 했다. 예비경찰대대의 병사들이 처벌의 두려움이나 강압 때문에 유제푸프 학살에 참여했을 거라는 지레짐작은 틀렸다.

 

더 놀라운 것은 101 예비경찰대대의 장교와 하사관을 제외한 일반 병사들은 매우 평범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반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출신이었으며, 63%가량이 노동자 계급이었다. 항구도시의 특성상 부두 노동자와 트럭 운전기사가 가장 많았고, 그 외에 보세창고 노동자, 건설 노동자, 선원, 식당 종업원 등이 있었다.

 

나머지 35%는 판매사원, 민간 회사나 공공 기관의 사무직 등 중하층 화이트칼라 노동자였고, 2%만이 교사, 약사 등 중산층 전문직이었다. 평균 연령은 39세였다.

 

하층 계급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은 초등학교 학력이 보통이고, 도제교육이나 직업훈련 외에는 고등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다. 이들이 어느 정당 소속이었는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 혹은 좌파 계열의 노동조합 소속이 적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들이 나치의 인종적 유토피아 비전에 열렬히 호응하여 자발적 학살자가 되기 쉬운 특별한 집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학살에 참여했다고 해서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폴란드의 반유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폴란드 민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구한 것과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예비경찰대대의 중년 독일인들은 특별히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으면서도 유대인을 학살하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었던 것이다. 평범하고 선량하기까지 한 이들이 학살자가 된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01 예비경찰대대 연구로 학위를 받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의 설명에 따르면, 동료들에게서 받는 무언의 압력이 이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파 트라프의 열외 제안에 따라 앞으로 나선다면 자신이 매우 약하고’ ‘겁쟁이임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싶어 대부분의 대원이 주저했다는 것이다.

 

 

 

경찰이든 군인이든 제복을 입은 집단일수록 집단적 정체성이 강하고, 같은 제복을 입은 동료의 압력을 더 강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101 예비경찰대대 아저씨들의 경우에도 그랬던 듯하다. 이들에게는 동료들 눈에 비칠 자신의 체면이 희생자와의 어떠한 인간적 교감보다 더 중요했다. 집결한 부대원들 앞에서 겁쟁이 취급을 받고 체면을 잃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대원의 회고처럼, 겁쟁이가 되기 싫어 학살에 참여한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겁쟁이였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동료들의 압력을 느끼며 대열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한 수동적 공범

 

이 경찰 아저씨들은 대부분 열렬한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많은 독일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나치의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 무감각하게’ ‘수동적으로’ ‘아무 동정심 없이반응했다. 그것은 단순한 무관심이기보다는 수동적 공범성혹은 객관적 공범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는 이언 커쇼(Ian Kershaw)의 지적은 사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독일인 이웃들의 무관심 속에서 유대인은 인간적인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범주 밖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마디로 유대인은 죽여도 괜찮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였다. 이 평범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동부전선에서 민간인을 합법적으로 살해할 것을 암시한 나치의 바르바로사 포고령과 조응하여 대규모 학살을 낳았다. 독일의 중산층 유대인과는 외모부터 다른 동유럽 유대인을 호모 사케르로 취급하기는 훨씬 쉬웠다.

 

히틀러와 나치 수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곤란하다. 동유럽의 학살 현장에서 실제로 유대인을 죽인 것은 나치 수뇌부의 펜이나 명령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 병사의 소총이었다. 구조가 사람을 학살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 나치의 학살 기계도 현장에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살 명령을 내린 권력자뿐만 아니라 학살 기계를 작동시킨 아주 평범한 실행자의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들을 평범한 독일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

 

그들이 평범한 독일인이라면 학살 문제는 독일만의 특수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독일 역사의 고유한 특징들을 따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특정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전 세계의 아주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101 예비경찰대대 아저씨들처럼 학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사에서 캄보디아, 르완다, 옛 유고슬라비아 등 길게 이어지는 제노사이드의 목록이 이 점을 잘 입증해준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했듯이, 홀로코스트는 독일의 과거사가 아니라 현대 문명에 잠재된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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